
제 1 호: 2024. 11. 16. 토요일(음력 10. 16)

사랑도 나무처럼 - 이해인
사랑도 나무처럼
사계절을 타는 것일까
물오른 설레임이
연두빛 새싹으로
가슴에 돋아나는
희망의 봄이 있고
태양을 머리에 인 잎새들이
마음껏 쏟아내는 언어들로
누구나 초록의 시인이 되는
눈부신 여름이 있고
열매 하나 얻기 위해
모두를 버리는 아픔으로
눈물겹게 아름다운
충만의 가을이 있고
눈 속에 발을 묻고
홀로서서 침묵하며 기다리는
인고의 겨울이 있네
사랑도 나무처럼
그런 것일까
다른 이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그리움의 무게를
바람에 실어 보내며
오늘도 태연한 척 눈을 감는
나무여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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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새가 있는 언덕길에서 1~4) - 이해인
1
새야, 네가 앉아 있는 푸른 풀밭에 나도 동그마니 앉아 있을 때, 네 조그만 발자국이 찍힌 하얀 모래밭을 맨발로 거닐 때 나도 문득 한 마리 새가 되는 느낌이란다.
오늘은 꽃향기 가득한 언덕길을 오르다가 네가 떨어뜨린 고운 깃털 한 개를 주우며 미움이 없는 네 눈길을 생각했다.
지금은 네가 어느 하늘을 날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주운 따스하고 보드라운 깃털 한 개로 넌 어느새 내 그리운 친구가 되었구나.
넌 이해할 수 있니?
늘 가까이 만나 오던 이들도 어느 순간 왠지 서먹해지고, 처음 대하는 이도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것처럼 정답게 느껴질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말이야.
네가 무심히 흘리고 간 한개의 깃털이 나의 시집 갈피에서 푸드득 날개소리를 내듯이 내가 이 땅에 흘려 놓은 시의 조각들이 어디선가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니?
아니 하늘로 영원히 오르기 전에 사랑하는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이미 새가 될 수 있다면...
너를 조용히 생각하는 오늘밤은 나의 삶도 더욱 경이롭게 느껴져 잠이 오질 않는구나.
내 삶의 숲에는 아직도 숨어 있는 보물들이 너무 많아 나는 내내 콩새가슴으로 설레이는구나.
2
해질녘, 수녀원의 언덕길과 돌층계 위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면 내 마음에 새가 되어 날아드는 어린 시절의 동무들.
“나하고 놀자” “소꼽놀이 하자”고 불러내던 눈매 고운 소녀도, 학교 갈 때면 내가 보고 싶어 목을 길게 빼고 우리 동네 쪽을 바라보며 걷는다고 얘기했던 마음 어진 소년도 수평으로 앉아 있다가 파도 모양을 그리며 천천히 날아오네.
깊은 뜻도 잘 모르고 전에 자주 되풀이했던 그립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이젠 너무 오래 안 듣고, 안하고 살았더니 문득 어린 시절의 동무들이 날아와 나를 부르네.
3
친구야, 네가 너무 바빠 하늘은 볼 수 없을 때 나는 잠시 네가슴에 내려앉아 하늘냄새를 파닥이는 작은 새가 되고 싶다.
사는 일의 무게로 네가 기쁨을 잃었을 때 나는 잠시 너의 창가에 앉아 노랫소리로 훼방을 놓은 고운 새가 되고 싶다.
모든 이를 다 불러모을 넓은 집은 내게 없어도 문득 너를 향한 그리움으로 다시 짓는 나의 집은 부서져도 행복할 것 같은 자유의 빈집이다.
4
10년 가까이 사회와 격리된 높은 담장 안에서 자유를 그리며 라면 박스로 만든 서가에 <꽃삽>이란 나의 책도 꽂아 두고 본다는 대철의 글을 약간은 슬프게 새소리를 들으며 읽었다.
`오늘은 한 주일 동안 쌓인 빨래는 하는 날.
우중충한 세면장에 덩그라니 혼자 앉아 양말을 빨고 있는데 창 밖에 웬 참새소리가 그리 요란한지. 재잘재잘재잘...
하도 시끄럽길래 일어나서 내다보았더니 잎이 파란 삼나무 한 그루 외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아마도 놈들이 그 안에 숨어서 지절거리는 것이겠지요. 갑자기 한 놈이 후두둑하고 튀어나오더니 십여 마리가 뒤따라 나와 저쪽 취사장 쪽으로 날아가 버리데요.
재잘재잘하는 여운만 남겨 놓은 채. 문득 `살아갈수록 가볍고 싶은데 살아갈수록 내가 무겁구나` 하는 수녀님의 새에 대한 단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렇게 새처럼 가볍게 지절거려 본 일이 또 지절거림을 들어 본 일이 얼마나 되었던가요?
밖에서였더라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핀잔이나 받았을 조잘거림이 왜 이리 그리운지요.
기분같아서는 누군가 옆에서 하루 종일 조잘거린다 해도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꽤 무거운 저는 오랜 격리생활 때문에 더욱 무거워진 것 같습니다.
아, 새처럼 공기처럼 가벼울 수 있다면...`

천국의 열쇠 - A.J. 크로닌
제1부 끝머리의 시작
1938년 9월 어느 늦은 오후에 프랜치스 치셤 노신부는 성 콜롬바 교회에서 나와 다리를 절룩거리며 언덕 위에 있는 자기 집으로 통하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노쇠하긴 했으나 그는 마커트 와인드의 완만한 고갯길보다는 이 비탈길을 더 좋아했다.
이윽고 담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의 좁은 문 앞에 다다라선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러운 정복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멈춰 서서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언제 보아도 좋은 경치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눈 아래에는 은빛 티드 강의 잔잔하고도 폭넓은 흐름이 가을의 석양에엷은 사프란 빛을 발하며 굽이치는 것이 보였다.
북쪽 스코틀랜드 쪽의강변 언덕바지에는 티드사이드 시의 너저분한 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고, 핑크나 노랑색 천조각과 같은 타일 지붕들이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길을가리고 있었다.
이 국경 도시는 지금도 높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성벽 위의 크리미아 전쟁 때 빼앗은 대포는 지금은 게를 쪼아먹으러 오는갈매기들의 휴식처에 지나지 않았다.
강어귀의 모래톱에 널어놓은 어망에는 안개가 자욱했으며, 항구로 들어오는 고깃배의 너덜너덜한 돛대는 하늘을 향해 늘어서 있었다.
뭍 쪽으로 눈을 돌리니 청동색의 조용한 다람 숲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고, 그 숲을 향해 백로가 한 마리 부지런히 날아가고 있었다.
맑고도 싸늘한 공기는 장작을 태우는 냄새와 떨어진 사과의 강한 향기에 넘쳐 있어 계절보다도 빨리 첫서리가 내릴 듯한 느낌이었다.
치셤 신부는 자못 만족스럽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고는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정원으로 들어갔다.
'비취 동산' 의 정원과는 비할 수 없었으나 스코틀랜드의 정원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었고, 부드러운 울타리를 따라 손질이 잘 된 과수가 늘어서 있어 실로 풍요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정원 남쪽에 있는 배나무가 으뜸이었다.
잔소리가 많은 정원사 두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신부는 조심스레 부엌 쪽을 살펴보고 나서 제일 잘 생긴 배를 하나 따서 법의 속에 감추었다.
그리고는 낡아서 지금은 못 쓰게 된 우산 대신 유일한 사치품으로 산 격자무늬 새 우산을 지팡이 대신 짚고는 주름투성이의 누런 얼굴을 자랑스럽게 반짝이면서 절룩거리며 자갈길을 걸어갔다.
무심코 현관 쪽을 바라보니 자동차가 한 대 멈춰 서 있었다.
불쾌한 생각으로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
기억이 나쁜데다 이따금 방심 상태가 되는 것을 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는 차를 보고 갑자기 얼마전에 주교의 편지로 당혹했던 일을 생각해 낸 것이다.
주교는 비서인 스리스 신부의 방문을 제안이라기보다는 통지해 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스리스 신부는 응접실에 불기가 없는 난로를 뒤로 하고 약간 굳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거무스레하고 여윈 듯한 얼굴을 기품이 있어 보였으나, 주위의 초라함을 보고는 성직자의 위엄이 손상이라도 된 듯 화가 나 있었다.
도자기라든가 칠기 같은 뭔가 동양의 토산물이라도 있어 주인의 취미를 엿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방 안은 텅 비어 있고 바닥은 보잘것없는 리놀륨이 깔려 있었으며, 담요로 덮어씌운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을 뿐 이렇다 할 만한 특징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힐난하는 듯한 표정으로 낡아빠진 벽난로 위에 아직 계산도 하지 않은 현금과 그 옆에 놓여 있는 팽이를 곁눈질로 흘겨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절을 지키겠다는 생각인 듯 얼굴을 부드럽게 하고 치셤 신부가 정중하게 변명하려는 것을 말렸다.
"저는 벌써 가정부의 안내로 제가 쓸 방을 알았습니다. 4, 5일 신세를 져야 할 형편인데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오후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 경치는 참으로 근사했답니다.
타인카슬로부터 여기에 이르는 길은 마치 산 모랄레스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는 거드름을 피우며 어두워지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리스 신부를 보고 있으려니까 타란트 신부와 신학교의 일이 생각나서 늙은 신부는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스리스 신부의 고상한 몸가짐이나 날카로운 눈초리, 오똑한 콧날까지가 타란트 신부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아무쪼록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하고 노신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곧 식사시간이 될 겁니다.
정식을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여기서는 그만 스코틀랜드의 하이 티(고기 요리를 곁들인 저녁 식사)의 습관대로 한답니다."
스리스는 반쯤 외면한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침 그때 미스 모파트가 들어와 낡은 커튼을 걷어 젖히고 식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스리스는 겁에 질린 듯이 자기를 힐끔 쳐다보는 얌전한 이 여자가 이 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 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은 불쾌한 느낌을 받았으나 그녀가 있었으므로 화제는 이어나갔다.
식탁에 앉자 스리스는 이번에 건립되는 타인카슬 대성당의 외장을 위해서 주교가 일부러 카라라에서 구해 온 특별한 대리석에 대해 칭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햄과 내장을 곁들인 달걀찜을 다 들고 나자 브리타니아의 티 포트로 따라 준 홍차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잘 구어진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면서 그는 치셤 신부가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어떻습니다, 수프는 안드레아도 함께 들어도 되겠습니다. 안드레아, 이 분이 스리스 신부님이시다."
스리스는 얼굴을 들었다.
아홉 살쯤 된 사내아이가 어느 사이에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푸른색 스웨터를 입은 길쭉하고 창백한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긴장시킨 채 머뭇머뭇하더니 살며시 자기 자리에 앉으며 기계적으로 우유 주전자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접시 위로 고개를 숙였을 때 축축한 갈색 머리카락이-미스 모파트가 스폰지로 씻어 주었기 때문에 젖어 있었다.
보기 싫게 이마위에 늘어져 있었다.
그 파란 눈에는 어린이답지 않게 이 자리의 심상치 않은 일의 예감이 깃들어 있었다.
소년은 불안스럽게 고개를 떨군 채 얼굴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스리스 신부는 의젓함을 보이며 다시 천천히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이야기의 본론을 꺼낼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끔 그의 시선은 은연중에 소년 쪽으로 가 있었다.
"아, 네가 안드레아냐?"
단순한 인사로라도 뭔가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조금은 친절함을 보여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래, 이곳 학교에 다니니?"
"네......"
"아, 그랬었구나. 그럼 무엇을 배웠니?"
그는 상냥하게 간단한 질문을 두세 가지 던져 보았다. 소년은 얼떨떨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고 있는 바람에 완전히 무지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스리스 신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형편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마치 빈민굴의 아이 같군.'
그는 내장요리를 다시 한 입 먹었다.
문득 알고 보니 자기만이 고급요리를 먹고 다른 두 사람은 죽을 먹고 있었으므로 얼굴이 붉어졌다.
노인으로부터 이런 금욕주의를 과시 당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치셤신부도 그의 기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나는 스코틀랜드의 맛있는 오트밀을 몇십 년이나 먹지 못하여 요즘은 매일 그것만 먹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스리스 신부는 잠자코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던 안드레아가 얼핏 눈을 들어 먼저 일어나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식후의 기도를 드리고 일어서다가 스푼에 팔꿈치를 부딪혀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무거운 장화 소리를 내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식사를 끝낸 스리스 신부는 거만스럽게 일어나 난로 앞으로 가서 뒷짐을 지고는 아직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는 늙은 동료를 슬며시 관찰하고 있었다.
'이거 참 곤란하군' 하고 스리스는 생각했다.
성직자의 신분으로서 이건 너무나도 한심스러운 것이었다.
얼룩진 더러운 법의, 땟국이 반질거리는 칼라, 혈색이 나쁜 까칠한 피부의 볼품없는 늙은이! 한쪽 볼에 있는 흉터처럼 보기 흉한 빨갛게 부은 자국은 아내 눈꺼풀을 뒤집어 놓아서 그 때문에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느낌이었다.
영원히 비뚤어진 것 같은 목은 절름거리는 한쪽 다리와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언제나 아래를 향하고 있는 눈은-이따금 위를 쳐다보는 수도 있지만 날카로운 사팔뜨기며, 그것이 이상스럽게도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스리스 신부는 헛기침을 했다.
드디어 얘기를 꺼낼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는 애써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이곳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치셤 신부님?"
"1년이 되었군요."
"아, 그렇습니까. 주교님께서 신부님을 이곳에 오시게 한 것은 여간 친절한 배려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귀국하시자 바로 고향으로 말입니다."
"이곳은 주교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스리스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교님께서 신부님과 같은 고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신부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다? 일흔이 다 되셨지요?"
치셤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잖게 노인다운 긍지를 가지고 덧붙여 말했다.
"나는 그래도 안셀모 밀리보다 나이가 많지 않소."
스리스 신부는 노인의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투에 얼굴을 찌푸렸으나 그것은 이내 연민의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요? 그러나 같은 일생이라도 신부님은 주교님과 비교할 때 너무 심한 차이가 나는 것 같군요."
그는 몸을 뒤로 젖히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주교님도 저도 신부님이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성실하게 일해 오신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이제는 신부님이 그 보답을 받으실 때라고 생각합니다......그러니까 은퇴하실 때가 왔다는 말씀입니다."
그 순간 방 안은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그러나 나는 은퇴할 생각이 전혀 없소."
"저도 여기 온 것이 무척 괴롭습니다."
스리스는 조심성 있었고, 시선은 천정을 향한 채 말했다.
"조사를 한 다음 주교님께 보고를 드려야 합니다."
간과해선 안 될 일도 있고 해서요."
"그게 뭡니까?"
스리스는 안절부절 못하는 몸짓을 했다.
"여섯 가지......열 가지......아니 더 있습니다. 숫자를 세는 것이 제 역할을 아닙니다만, 신부님의......그 동양적인 엉뚱한 행동 말입니다."
"그건 유감이군요." 노인의 눈에서는 서서히 불꽃과 같은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중국에서 35년 동안이나 살았었다는 것을 제발 잊지 마시기를."
"이곳 교구의 사무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엉망이라지요?"
"빚이라도 졌다 이 말씀인가요?"
"그런 것은 우리가 알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일년에 네 번 내는 헌금에 대해서도 최근 6개월 동안 아무 보고도 받지 못했어요."
스리스의 억양이 높아지면서 말도 빨라졌다.
"이것저것 모든 것이 너무 비사무적이고......예를 들면 말씀입니다.
브랜드의 거래처에서 지난 달에 청구서를 댄 데 대하여......양초값 3파운드와 그 밖에 있어서......신부님은 그걸 모두 동전 으로 지불하셨지요!"
"받은 돈이 모두 동전이었기 때문에......"
치셤 신부는 물끄러미 스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언제나 나는 돈에 대해선 관심이 없으니까 돈이란 것을 가져 본 경험이 없어서......그러나 결국 당신은 돈이란 것을 그렇게까지 중대하게 생각하고 있군요."
난처하게도 스리스 신부는 스스로 의식할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하고 그는 들추어냈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하신 설교나......충고나......교리에 대해서도 어느정도까지는." 그는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가죽 표지의 노트를 새삼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모두가 위험할 정도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천만에!"
"성령 강림 대축일에도 신부님께서는 신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여러분의 손바닥 안에 있다......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그리고 어디에 있어도 좋은 것이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스리스는 노트를 넘기면서 검열관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또......사순절 동안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신론자라 해서 모두 지옥에 간다고 할 수 없다. 나는 한 사람, 지옥에 가지 않은 무신론자를 알고 있다.
지옥에는 하느님 얼굴에 침을 뱉은 자만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너무 심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었으나 공자 쪽은 유머가 풍부했다!"
스리스 신부는 단호한 태도로 노트를 덮어 버렸다.
"아무리 보아도 신부님은 이미 자기의 영혼에 대한 지배력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고 치셤 신부는 침착하게 "나는 어떤 영혼에 대해서도 지배력 따위를 갖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는데요."라고 말했다.
스리스의 얼굴에는 불쾌한 듯한 빛이 더욱 짙어졌다.
새삼스럽게 이런 영감쟁이를 상대로 신학상의 토론을 벌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양자로 삼은 안드레아도 말입니다."
"내가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저 아이를 돌봐 주겠소?"
"랠스톤에 수녀원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은 이 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고아원입니다."
치셤신부는 사람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눈으로 스리스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자기 어린 시절을 그 고아원에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았소?"
"그렇게 개인적인 일에까지 비약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경우에 따라서 그 이유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이런 상태는 아주 변칙적으로 어떻게든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게다가......" 하고 그는 양손을 쭉 뻗쳤다.
"신부님이 이곳을 떠나시고 나면......우리가 그 아이의 거처를 마련해야겠지요."
"우리를 내쫓을 작정이군요. 나도 수녀원 신세를 지란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신부님은 클리톤의 노사제관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곳에는 완전한 평화와 안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치셤 신부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메마른 짧은 웃음이었다.
"완전한 안정이라면 죽은 뒤에 충분히 취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늙은 신부들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이상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으나......나는 신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오."
스리스는 당황해 하며 쓴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신부님. 실례지만 이 말만은 해야겠습니다......신부님의 평판은 중국에 가시기 전부터도 역시......신부님의 생애가 좀 기 이한 것이었으니까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치셤신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일생의 청산서를 하느님께 제출하겠소."
스리스는 자신의 경솔을 게면쩍게 여기면서 시선을 떨구었다.
좀 지나친 것 같았다.
성격은 차가운 편이었으나 그는 늘 공정하게, 아니 신중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처한 얼굴을 보이는 것 정도는 터득하고 있었다.
"물론 저는 신부님의 재판관이라든가 또는 조사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아무튼 어떻게 될지 이 며칠 동안 기다려 볼 필요가 있겠지요"
하며 그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성당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대로 계십시오. 길은 알고 있으니까요."
다소 부자연스러운 미소로 입을 일그러뜨리며 스리스 신부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치셤 신부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테이블을 향해 앉아 있었다.
어렵사리 얻어낸 이 한적한 생활이 이렇게 별안간 위협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무엇인가가 완전히 부서져 버린 느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에 여러가지 환경에서 어거지로 얻은 체념도 이번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뭔가 갑자기 하느님에게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무의미하고 낡아빠진 인간처럼 생각되었다.
타오르는 듯한 적막감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것은 대단한 무게를 가지고 밀어닥쳤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주님이시여, 주님이시여, 어찌하여 당신은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는 힘없이 일어서서 2층으로 올라갔다.
응접실 위에 있는 다락방에서는 안드레아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모로 누워 몸을 방어라도 하듯이 베개 위에 여윈 한 팔을 겹쳐 베고 있었다.
치셤 신부는 그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배를 꺼내어 침대 옆에 벗어 놓은 옷 위에 얹어 놓았다.
그것밖엔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다.
산들바람이 모슬린 커튼을 흔들었다.
그는 창문께로 가서 커튼을 젖혔다.
서리라도 내릴 것 같은 하늘에는 별들마저 떨고 있었다.
이 별빛 아래 형태도 없고 고결함도 없는, 하찮은 노력 위에 세워진 자기의 어리석은 생애의 긴 세월이 펼쳐져 있었다.
이 티드사이드 거리에서 뛰어놀던 소년 시절의 나날이 바로 엊그제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추억은 멀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만일 자기의 일생이 어느 일정한 틀에 따라 씌어진 것이라고 하면, 그 숙명적인 첫머리의 기록은 아마 60년 전 그 4월의 토요일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누구로부터도 방해를 받지 않은 행복한 날이었기 때문인지 그것은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으면서도 아무도 몰래 지나가 버린 것이다......
천국의 열쇠 → 표지



풍문님 제가 드린 펨플릿 으로 한5분 동안 복사 붙여 넣기 신공으로 만들어 본 것 입니다.
이렇게 활용합니다.